라이언 존슨 감독의 나이브스 아웃 후속작 글래스 어니언은 날카롭고 세련된 사회풍자형 추리극으로, 권력과 자아, 현대 부호들에 대한 환상의 층위를 벗겨내며 디지털 시대의 진실과 허상을 해부합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속편이 전작만큼 성공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나이브스 아웃처럼 사랑받은 영화의 경우 더더욱 그렇죠. 하지만 글래스 어니언은 전작을 흉내 내는 기존의 속편의 행보 대신, 추리극의 공식을 완전히 새롭게 변형시키는 선택을 합니다. 새로운 등장인물, 햇살 가득한 그리스 섬, 그리고 독특한 서사 구조 속에서 라이언 존슨 감독은 단 하나의 미스터리가 아닌, 여러 겹의 진실과 자아, 인식을 하나하나 벗겨냅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억만장자 테크 기업가 마일스 브론(에드워드 노튼)이 소유한 그리스의 한 프라이빗 섬입니다. 그는 인플루언서, 정치인, 과학자, 사교계 인사들을 초대해 살인 추리 게임을 벌입니다. 그러나 이 가짜 살인은 곧 실제 살인으로 바뀌고, 다시 한번 명탐정 브누아 블랑(다니엘 크레이그)이 진실을 찾아 나섭니다. 이번엔 훨씬 더 날카로운 도구를 들고서 말이죠.
1. 브누아 블랑: 여전히 날카롭지만, 이제는 더 피곤해진 명탐정
다니엘 크레이그의 브누아 블랑은 이번에도 유쾌하게 돌아왔습니다. 남부 억양과 예리한 추리력으로 무장한 그는 여전히 시리즈의 중심입니다. 하지만 글래스 어니언 속 블랑은 다소 좌절감을 느낍니다. 진실된 인간성을 본질로 하는 그는 진실보다는 ‘쇼’가 우선시되는 세상과 그런 세상의 축소판으로 보이는 그리스의 섬에서 그 역시 방향을 잃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블랑은 등장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 허세 가득한 말들 사이에서 진짜 의미를 포착합니다. 그는 일부러 어리숙한 척하면서 사람들의 본색을 이끌어내며, 표면적인 말들 너머에 숨은 진심을 꿰뚫어 봅니다.
디지털로 포장된 세상에서 블랑은 여전히 ‘객관적 진실’을 믿는 드문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런 드문 존재는 또 다른 진실된 인간을 알아보고 협력합니다.
2. 미스터리 속에 숨겨진 현대 사회에 대한 풍자
겉으로는 전통적인 추리극의 형식을 따르는 듯하지만, 글래스 어니언은 현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극이기도 합니다. 각 인물은 오늘날의 다양한 사회적 과잉을 상징합니다. 허세 가득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자신만의 철학이랄 것도, 문법적 지식도 없는 테크 CEO, 말 실수 연발 정치인, 오로지 대중적 관심에만 목마른 인플루언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 양심을 팔아버린 과학자 등.
존슨 감독은 개인을 조롱하기보다는, 이런 인물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구조’를 비판합니다. 부와 권력,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쉽게 왜곡되고 악용될 수 있는지를 말이죠.
결국 이 영화의 진짜 범인은 ‘사회’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3. 반전과 회상, 그리고 시간회귀의 트릭
글래스 어니언은 시간과 구조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관객에게 놀라움을 선사합니다. 처음 절반은 단순한 설정처럼 보이지만, 중반 이후 영화는 과거로 다시 돌아가 실체적 사건을 새롭게 재조명하며 모든 구도를 뒤바꿉니다.
이 비선형적 전개는 영화의 핵심 주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진실은 절대 표면에 있지 않다는 것. 제목 속 양파처럼, 껍질을 벗길수록 또 다른 면이 드러납니다.
라이언 존슨은 긴장감, 유머, 사회적 메시지를 유려하게 조율하며, 이야기의 속도와 톤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끌어 나갑니다.
4. 시각적 상징과 스타일의 역할
나이브스 아웃이 가을 분위기와 고전적인 톤을 유지했다면, 글래스 어니언은 지중해의 밝은 햇살과 화려한 색채로 가득합니다. 휴양지의 찬란한 풍광, 고급스럽고 다채로운 의상, 웅장한 건축물. 하지만 이 화려함은 기만적입니다. 섬은 아름답지만 인공적인 한계로 가득차 있으며, 사람들은 매력적이지만 그 내면은 공허합니다.
디테일 하나하나가 상징적입니다. 마일스 브론의 기괴한 조각상들, 저택 한가운데 있는 유리 양파 조형물 등, 모두가 ‘겉과 속이 다른’ 현실을 암시합니다.
등장인물의 의상조차도 내면의 변화를 반영하는 장치로 활용됩니다. 불안, 오만, 자각을 옷으로 표현하는 것이죠.
5. 무능한 권력이 더 위험하다
글래스 어니언의 가장 날카로운 메시지는 ‘천재 악당’보다 ‘멍청한 권력자’가 더 위험하다는 점입니다. 마일스 브론은 혁신가가 아닙니다. 그의 본질은 사기꾼이며, 주위에는 갖가지 개인적인 욕망과 두려움을 이유로 비판하지 못하는 동조자들만 가득합니다.

이 영화는 기존의 서사를 완전히 뒤집습니다. 진짜 악당은 뛰어난 두뇌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무지하고 요란스럽지만 부자인 사람입니다. 라이언 존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어쩌다 이런 사람을 여기까지 오게 뒀을까?”
이것은 단순한 살인 추리극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던지는 질문입니다.
결론: 날카로운 오락이자 현실의 거울
글래스 어니언은 재치 있고 스타일리시하면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잘 알고 있는 영화입니다. 겉으로는 미스터리극이지만, 실제로는 가짜 뉴스와 허상이 만연한 시대에 진실을 찾아내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웃기고, 슬프고, 때로는 끔찍한 방식으로 말이죠.
라이언 존슨은 또 한 번 증명해 보입니다. 살인 미스터리는 퍼즐만이 아니라, 사회의 거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거울에 비친 현실은 놀라울 정도로 우스우면서도 무섭습니다.